성연진  YEONJIN, SEONG

 
 

<비오는 770km의 풍경> 의 마주침

매주 반복하는 770km의 긴 풍경 동안 작가는 뭉근한 검정 속에 점으로 있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 이른 나이부터 매주 꽤 긴 거리를 반복해 이동하던 작가에게 버스 밖 풍경은 작가의 삶과 심상의 이다. ‘학교사이에 어느덧 거주지와 직장이 더해지고 집은 고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곳들을 잇는 경유지로 인해 거리는 더욱 길어졌다. 770km는 시속 80km로 달린다더라도 대략 열 시간이 걸리는 시간, 작가는 매주 그 시간의 풍경 속에서 나의 집을 찾는다.

작가의 ‘곳’ 고향


아무래도 자기를 찾는 일은 고향에서부터 시작하는가 보다. 십수 년 동안 이동 거리는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와 집의 139km에서 지금은 770km로 늘어났지만, 그 긴 거리 동안 작가의 풍경에서 빠르고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를 찾기 어렵다. 먼 풍경도 과감하게 기하학적으로 잘라서 담아낸 들은 작가 고향의 자연을 닮아있다. <비 오는 770km 풍경> 시리즈의 가로수들은 쭉 뻗는 줄기를 중심으로 잘라내 길에 심은 가로수보다 나무가 서있음에 집중시킨다. 작가에게 그 나무가 어느 거리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야생의 나무들처럼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어가는 구심점이 굳건히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좁은 화면에서 가로수 뒤 풍경은 때로는 하얗게 없어지고, 때로는 울창한 나뭇잎의 그림자처럼 어른대며 그들의 굳건한 생명력을 돋보이게 한다.
작가가 보는 원경도 그러하다. 도심의 도로에서 국도, 고속도로를 오가며 달리며 보는 풍경에서 작가는 도시를 단호하게 잘라내고 뭉개어 빼곡하고 다부진 수풀을 찾아낸다. 네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작품 <작은 집>(2024)에서 지붕 같은 세모 모양을 이루는 위쪽의 마주한 두 패널은 비스듬한 산 능선의 부분이 조금 그려있다. 전체 화면의 1/6 정도만 차지한 수풀은 완만한 능선임에도 짙고 뭉그러진 형상으로 어딘지 모르게 깊은 강원도의 원초적 숲 같은 묵직한 힘을 낸다.
일찍이 시작한 긴 여정에서 늘 고향이 그리운 것일까? 혹은 결국 그곳을 향하는 것일까? 어쩌면 아직 집이 없는 작가에게 고향의 풍경은 나의 집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곳’ 점


유난히 집에 가는 길에 비가 자주 왔다는 작가는 정착 없이 이동하는 자신을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에 투영한다. 풍경들은 변하되 그 자리에 있고, 빗방울은 그 풍경을 담지만 버스와 바람의 힘에 따라 흩뿌려지고 밀려나고 무겁게 맺혀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예술가란 평생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긴 호흡으로 살아야 하지만, 작가로서 성장을 위해 이곳저곳의 심사를 받으며 기간 한정적 과제와 일시적 거주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있는 작가는 그림 속 빗방울처럼 점으로 있는 듯한 말을 했다.
“계속 새로운 기회를 찾아다니며 그곳의 과제들을 해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쩐지 아직 내 그림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작가의 ‘곳’ 검정


작가의 풍경은 검다. 770km의 긴 풍경이 너울 안에서 섬세하고 묵직한 검정빛을 찾아 담는다. 겹겹이 부단히 쌓아간 먹물은 종이의 질감을 변형시키며 오묘한 무게감을 드러낸다. 작가는 먹에 따른 미묘한 색 차이와 백반과 물, 종이의 사용까지 세밀히 실험하며 흐릿하고 풍경과 또렷하고 빛나는 점이 있는 다부진 검은 ‘곳’을 만들어낸다. 세피아 빛의 검정에서 시작한 작가의 풍경에 조금씩 색이 점차 적극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먹색은 검푸르기도, 자색을 자아내기도, 때론 검정의 깊이에 쉬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검은 금속 빛을 반사하기도 한다. 이동의 반경이 넓어지듯 검정의 폭도 풍성해지고 있다. 세 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비 오는 770km의 풍경>에서 흑연 같은 청회색 빛의 검정, 녹색 빛의 검정, 세피아 톤의 검정은 곧 공주를 떠나는 작가의 다음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곳’ 마주침


작가는 분명히 자연을 그린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거나 뭉개기도 하지만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미색의 종이에 먹으로만 표현한 자연은 흑백의 대조로 기하학적 인공의 풍경을 만든다. 과감하게 자른 풍경을 화지 가득 채워 무게 사각형으로 묵직한 무게감을, 산의 능선을 과감하게 잘라 세모와 마름모 화면의 역학으로 긴장감을, 좁은 화폭에 나무의 기둥으로 수직의 면 분할로 도로 난간 살 같은 리듬감을 만든다. 그리고 뭉근한 원경 위에 물방울로 시작한 근경의 점들이 있다. 자리를 또렷하게 잡은 점들은 미묘한 무게감으로 중력과 속도를 만들며 가로의 이동, 멈춤의 세로, 속도의 기울기를 넌지시 조정하며 관객이 작가의 770km의 이동을 경험하게 한다. 작가는 자연을 보여주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 마주침을 만들어가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이동은 연속적이지 않다. 작가의 풍경은 긴 여정 중 축약된 길이와 시간의 ‘곳’들로 원경과 근경이 마주치고, 사실적 표현과 기하학이 마주치고, 멈춤과 이동이 마주치는 순간의 ‘곳’들이다. 아직 그 거리에서 무언가 만남으로 이루어져 구체적으로 연속된 하나의 시간과 길이로 만들어지지 못한 채 마주침의 순간만을 깨닫고 있다. 이 여정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혹은 어떻게 풀어지는지 작가는 그 마주침을 이리저리 탐구하고 있다.
빗방울 표현의 변화는 마주침을 만남으로 이어가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유리창에 또렷하게 맺혀 원경을 반전시키기도 하고, 그날의 빛과 시간을 고스란히 담던 빗방울은 꽃잎처럼 반투명한 점이 되기도 하고, 작은 눈송이처럼 뿌연 흰 점이 되기도 한다. 아교가 꼼꼼히 자리를 잡아 반짝이는 흰 점은 자연을 벗어난 인공의 빛이 되기도 한다. 굳건한 나무처럼 뿌리 내리고 싶지만, 집이 없이 고향과 거주지를 오가는 빗방울 같은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점이 변화가 물방울에서 시작했다. 앞으로의 마주침은 어떤 만남이 될까?
 

‘나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집, 성인으로서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는 집이 인간으로서는 기초적인 ‘집’의 개념일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마주침과 압축된 복잡한 심상이 오간다. 김민지 작가의 <비 오는 770km의 풍경>에 가만히 숨을 들이쉬며 발길이 멈추는 이유는 각자가 자신의 집을 찾아가며 느끼는 삶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집을 마련하면 이 그림은 멈출까?
김민지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그림을 찾는 것이 ‘나의 집’을 찾는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작가는 평생 고향의 수풀을 집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나설 것이다.